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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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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과 상담학에 ‘조하리의 창’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조하리의 창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어떤 면을 개선하면 좋을지를 보여주는 데 유용한 분석틀입니다. 조하리의 창 이론은 조셉 러프와 해리 잉햄이라는 두 심리학자가 1955년에 한 논문에서 발표했습니다.


    조하리의 창은 크게 4가지로 이루어 집니다.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 창’,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 창’,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보이지 않는 창’,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창’입니다. 

    저는 여기서 ‘미지의 창’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지만 하나님만 아는 ‘영적인 창’ 입니다. 이 네 가지의 창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창 영역의 넓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변합니다. 

    만약 내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나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면 내 마음의 숨겨진 영역은 줄어들고 열린 공간은 늘어납니다. 또한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내면을 본다면 우리 내면에 있는 장단점, 상처 등을 보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하나님께 나아가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나아 간다면 영적인 영역은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율법의 완성이며, 성경의 핵심 메시지 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새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특히 타인은 아는데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 보이지 않는 창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구나’ 또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마음의 영역이 확장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건강하고 긍정적인 관계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서로를 존귀히 여기며 존중하고 귀를 기울이며 사랑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Joshua
    조회수65
    2024-09-21
  • 본문내용

    누가복음 18장 25절 말씀을 보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우리는 이 구절에 나오는 ‘바늘귀’에 대해서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늘귀’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상황에 근거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그래서 바늘귀를 옷을 꿰매는데 사용하는 바늘의 아주 좁은 구멍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화로 ‘바늘귀’를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너무 지나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늘귀’에 대한 의미를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해석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쉽고 담백하게 다가옵니다. '바늘귀'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작은 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상황을 한 번 머릿속에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많은 낙타들이 매일 도시 안으로 들어옵니다. 짐을 낙타 등 양편에 나누어 얹는데, 때로는 그 높이가 90-120cm나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짐을 잔뜩 실은 낙타가바늘귀를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낙타들이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늘귀를 지나가기 전에 낙타에게 실은 모든 짐을 내린후 낙타를 먼저 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짐을 따로 들고 지나가야 합니다. 짐이 없는 낙타도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뒤에서 무릎을 꿇은 낙타를 밀어 넣어야 겨우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당시의 청중들 쉽게 이해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짐을 잔뜩 실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모습을 쉽게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늘귀에 대해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우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천국의 문평강의 문을 들어갈 수 없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11:28). 즉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구원자입니다무거운 짐이 삶을 짓누르고 계십니까참된 안식을 누리시길 원하고 계십니까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께 참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Joshua
    조회수125
    2024-06-25
  • 본문내용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을때 10대 소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날 무렵 마리아 말고도 많은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어떠한 특별한 것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은 전혀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마리아는 자랐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 나사렛은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과 거래해서 돈을 버는 유대인 남자들을 반역자들로 여겼고, 로마 병사들과의 거래를 통해 신분상승을 꿈꿨던 유대인 여자들은 그들보다 더 나쁘게 여겼습니다. 나사렛의 젊은 여성들은 힘을 가진 로마 군인들을 통해 편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 지역에 사는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것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 일까요?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것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 받았을까요?


    누가복음 1장 34절에서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누가복음 1:34)라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한 순결한 여성이었습니다. 다른 또래 여성들이 신분 상승을 위해 로마 군인과 거래를 할 때에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함을 지켰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재물, 명예, 성적인 유혹 등 온갖 유혹이 많습니다. 세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아닌 넓은 문, 넓은 길, 쉬운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아처럼 늘 말씀 가운데 머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도 누가복음 1장 38절의 마리아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길 고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이 임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이 참된 행복의 사람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Joshua
    조회수160
    2024-06-10
  • 본문내용

    솔로몬을 대적하는 이방인 하닷과 르손입니다.

    하나님은 하닷과 르손을 솔로몬의 대적으로 일으키십니다. 하닷은 에돔 족속으로 왕의 자손입니다. 다윗이 에돔과 전쟁 중이었을 때 하닷은 이집트로 도망하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으로 망명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하닷의 망명을 기쁘게 받아주고 애굽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제와 결혼을 시킴으로 인해 에돔과 이집트는 동맹을 맺게 됩니다.


    하닷은 다윗과 군사령관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에돔으로 돌아와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게릴라 전을 펼치면서 솔로몬의 일평생에 환난을 끼칩니다.르손이 엘리아다의 아들로 솔로몬의 대적이 됩니다(23절). 그는  소바왕 하닷에셀의 부하로 있다가 다윗과의 전젱애서 다메석으로 도망쳐 수리아의 왕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솔로몬의 대적자들인 하닷과 르손의 지리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면 솔로몬이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에돔 사람 하닷은 이스라엘의 남쪽에서, 수리아의 왕 르손이 위치한 위치는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중간에 위치한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솔로몬의 일평생에 괴롬을 주는 대적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에돔 사람 하닷과 수리아의 왕 르손이 솔로몬의 진정한 대적자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의 진정한 대적자는 바로 하닷과 르손 뒤에 게신 하나님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며 악해을 저지르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모습을 통해 흔히 세상이 말하는 가장 쉬운 방법, 가장 안전한 방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참된 안식이자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내 삶의 주인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형들에 의해 팔려나간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주관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결과 요셉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요셉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요셉과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가치관과 죄와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하닷과 르손과 같은 대적들이 일어나 우리의 영혼을 조금씩 갈아먹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르는 삶, 죄를 깨달을 땐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Joshua
    조회수289
    2023-10-07
  • 본문내용


    호주는 지금 라니냐 현상으로 폭우가 내리고 있습니다. 호주 동부 지역 곳곳에서는 큰 홍수가 나고, 인명 피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몸으로 맞으면서 문득 군대에 있었던 경험들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해군에서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군함을 탁 바다를 떠돌며 해상을 지키는 해군으로 군 생활을 하던 중, 서해 바다에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제가 탔던 군함은 이지스함이나 구축함이 아닌 수색을 위한 작은 군함이기에 거센 풍랑과 미쳐 날뛰는 파도를 피하기 위해 가까운 해군 기지가 있는 섬으로 피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군함을 방파제로 둘러쌓여 있는 항국에 꽁꽁 결박하여 고정시켜 놓고 주변을 돌아봤더니 작은 어선들은 서로 서로를 묶어 놓은채 항구에 고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큰 배들은 수심이 깊은 저 멀리 바다위에서 정박한 채 바다 속 깊이 닻줄을 내려놓고 거센 파도에 몸을 맡긴채 위아래로 요동치듯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저 큰배들은 왜 항구로 피신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육지에 배를 고정하고, 서로 서로 줄로 묶어놓었던 작은 배들은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로 인히 이곳저곳 부딪혀 파손이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멀리 깊은 바다 속에 닻줄을 내리고 높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던 큰 배들은 아무런 손상이 없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묵상하는 가운데 제 안에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친 세상 속에서 죄의 유혹이라는 거센 바람과 세상의 가치관, 나의 자아와 같은 파도들이 날 뛰에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마음 깊숙이 그 중심에 들어가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태풍과 같은 극심한 풍랑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 중심으로 들어가 닻줄을 내린다면 나의 영혼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거센 풍랑이 나를 흔들려고 하지만 하나님 마음 깊숙이 들어가 닻을 내리고 나의 자신을 맡긴다면 내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평강 가운데 항해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100% 맡겨야 합니다. 세상은 그리고 사단은 그리스도인된 우리를 뿌리채 뽑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거센 풍랑으로 흔들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떠한 일들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닻줄을 하나님께 내린다면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설프게 세상과 하나님 경계선에 자신을 묶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가는 깨지고, 부서지고 뒤집어지는 등 좌절과 상처, 얼룩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깊숙이 들어 닻줄을 내리고 모든 것을 맡긴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늘 하나님 안에 깊숙이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결론 내리기를 "여호와는 나의 산성, 요새, 피난처"가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안정감은 지금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십니다.

     

    주 나를 광야로 이끄실 때

    기쁨으로 나아 가리라

    신실하신 주를 신뢰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나는 두렵지 않네

    주 나와 항상 함께하시네


    주는 나의 모든 필요

    주가 나의 푸른 초장 되시네

    주님 안에 나 거하리

    그곳이 내가 숨 쉬는 곳


    Joshua
    조회수1229
    2022-10-27
  • 본문내용

     

    자기가 ‘주님’ 이라고 부르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겸손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을 권리가 없다. 언젠가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라는 질문을 하셨다. 


    나는 여기서 일부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은 반론 하나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율법을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우리의 의를 위해 부활하셨으므로 우리가 계명들을 지킬 필요는 없다.  오로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지난 50년 동안 복음주의의 메시지를 약화시키고, 교회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내렸다. 덕분에 이제 교회의 도덕적 수준과 세상의 그것은 거의 구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으로, 믿음으로부터 순종을 분리하는 것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전의 양면이 서로 붙어서 하나가 되어 있을 때에만 정상적인 돈으로 간주된다. 이 두 면을 서로 분리하면 동전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믿음이 전부가 되어버렸고, 순종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신앙인들은 도덕적으로 약해졌고, 영적으로 맹목이 되었으며,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약의 기독교에서 멀어지고 있다.


    영적 진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기 전에는 그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우리의 주님이 아주 분명히 밝히셨다. 그분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라고 말씀하셨다. 의지와 행함(적어도 ‘행하겠다는 의지’)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앎이 따라온다. 진리는 엄격한 선생이기 때문에 자신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드러내기 전에 먼저 순종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진해서 하는 순종’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불가능하다. 순종 없는 믿음만을 갖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Joshua
    조회수1617
    2022-06-25
  • 본문내용

    오늘은 사모와 함께 오래간만에 같이 쇼핑을 했습니다. 쇼핑을 한 이유는 매달 한번씩 시티 안에 있는 홈리스를 위한 선물 팩을 준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선물팩을 구매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000여년 전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잘 갖춰진 상류층의 집안이 아닌 가장 낮은 자리 즉 흙수저의 집안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멸시받는 세리의 친구로 또는 율법에 의해 부정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나병 환자들 그외에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허물없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만난 사람들의 삶은 변화가 되었고 회복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리 마태는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여종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삭개오, 실로암 못에 앉아 있는 38년된 병자 등 예수님을 만나 회복된 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 그리고 멸시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처럼 이 땅에 소외된 자들,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가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예수님의 마음을 놓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흥하면 교회의 숫자적인 부흥으로 여기고, 또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부흥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비추어 볼때에 부흥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드는 가운데 홈리스 형제, 자매들을 위한 작은 선물 꾸러미들을 구매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 의무적으로 홈리스 섬김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섬길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발걸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길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개척교회로써 작은 선물 꾸러미를 나눠주며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나누지만, 언젠가는 다함께 모여서 BBQ를 하며 예배 드리는 그날이 오길 믿음의 눈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Joshua
    조회수1753
    2022-05-06
  • 본문내용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에베소서 6장 12절)


    YWAM(Youth With A Mission: 예수전도단)의 영적인 리더 중 딘 셔먼 이란 분이 계십니다. YWAM 선교단체의 1세대로 영적전쟁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치셨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전쟁"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한 분이십니다.


    한번은 딘 셔먼 할아버지께서 "영적 전쟁" 강의를 하시고 난 후 마지막에 단 한 문장으로 영적 전쟁을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문장은 "삶과 싸우지 않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전쟁"이란 책을 보면 영적 전쟁은 어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영적 전쟁에 들어가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미다로 영적 전쟁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싫든 좋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전쟁 한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단의 공격과 화살에 노출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살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개인의 삶의 현장속에서 이루어지고, 신앙 공동체(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가운데 확장이 됩니다. 이를 두려워하는 사단은 끊임없이 신앙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구성원 한 사람, 한사람을 공격합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의 생각 가운데서 활동을 합니다. 그 이유는 사단은 영적인 존재이고, 사람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존재인 사단은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 끊임없이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을 그럴듯 하게 심어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유 의지로 악한 일들을 행하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생각이라는 가장 가까운데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내 안에 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때에 반대 정신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미움이 들어올 때에 더더욱 사랑하기를, 정죄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올 때에 용서하며 축복하며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막기 위해 죽음을 준비했지만, 예수님은 이에 맞서지 않으시고 반대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반대 정신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항상 작은 일상 속에서도 실질적인 진리를 행하며 살아가는 브리즈번시티순복음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Joshua
    조회수1807
    2022-01-22
  • 본문내용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창 13:5,6)


    서로 재산이 많아져서 아브람과 롯이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아브람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아브람의 넉넉한 성품과 권리를 포기하는 모습이다. 삼촌으로서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조카에게 양보하며 먼저 기회를 주는 넉넉한 

    성품은 성부의 성품이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단 지역을 택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것은 ‘롯이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죄가 가득한 땅이지만, 롯의 눈에는 물이 넉넉한 아름다운 땅으로 보였다. 그 땅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하나님의 시선이 달랐다.


    우리는 어떤 시선을 선택해야 하는가? 롯이 아브람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만큼의 땅을 주시며,또 종과 횡으로 다니는 만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약속을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셨을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먹음직한, 보암직한, 탐스러운 것을 선택하는 롯의 시선을 가질 것인가, 하나님의 시선으로 결정할 것인가?


    우리에게 롯의 시선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기다리실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결정하는 모든 요소들이 롯의 시선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신뢰하는 것들, 내 생각과 경험과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롯의 요소이다(게으름이나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 등도 롯의 요소일 수 있다).


    우리에게 있는 이런 요소들을 제거할 때 아브람을 찾아오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롯의 요소를 떠나보내라! 내 안에 있는 롯의 요소를 제거하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한 롯의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살 때 우리 안에 있는 롯의 요소가 제거된다 (출처: 갓피플)

    Joshua
    조회수1766
    2021-12-18
  • 본문내용

    이사야 43장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선택된 백성의 허물을 도말하고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 스스로를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이사야서를 좋아하기 때문에 많이 읽었지만 새롭게 다가온 말씀에 눈길을 멈췄다.

     

    "하나님 스스로를 위해서라고?"

     

    꼬리에 꼬리가 물들이 따라오는 생각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은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우상숭배하며 죄를 범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기로 아예 작정하고 죄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라고 용서를 선포하신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20여년 넘게 사역자의 길을 걸으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중 같이 팀을 이루며 함께 사역을 했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예상치도 못하게 뒷통수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믿고 신뢰했던 사람을 사역자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베풀고, 사역의 자리를 물려줬을 때에 예상치 못하게 배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적지않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시간들을 놓고 씨름을 하기도 하였다.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이며, 그 중에 한 민족을 택하여 언약을 맺으셨고, 돌보시고 함께하셨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뒷통수를 쎄게 친 것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수십 아니 수백, 수천번 이상...

    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용서하셨고, 품으셨다. 그 이유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그 자체이기에 그 사랑을 베풀지 못하면 안될 정도로,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사랑을 베풀기 원하고 계신다.

    마치 사랑을 베풀지 못하면 안달이 난 것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기를 원하시고, 또 베푸셨다. 그것도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어주는 사랑을 베푸셨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니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다는 것은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뒷통수를 수 없이 쎄게 맞아도 끊임없이 베푸셨던 하나님처럼 나 역시 그래야 한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사랑을 베풀고... 이것이 나의 삶의 과정이어야 한다.

     또한 내 삶 가운데 도적이든, 실수이든 하나님을 밀어내는 영역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몸부림치며 해결해야한다. 이것이 거룩함으로 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나에겐 이러한 능력이 없다. 난 너무나 연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성령님께서 내 삶을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있다. 난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믿음의 싸움을 걸어갈 때에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 믿는다.


    Joshua
    조회수1722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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