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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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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는 지금 라니냐 현상으로 폭우가 내리고 있습니다. 호주 동부 지역 곳곳에서는 큰 홍수가 나고, 인명 피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몸으로 맞으면서 문득 군대에 있었던 경험들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해군에서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군함을 탁 바다를 떠돌며 해상을 지키는 해군으로 군 생활을 하던 중, 서해 바다에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제가 탔던 군함은 이지스함이나 구축함이 아닌 수색을 위한 작은 군함이기에 거센 풍랑과 미쳐 날뛰는 파도를 피하기 위해 가까운 해군 기지가 있는 섬으로 피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군함을 방파제로 둘러쌓여 있는 항국에 꽁꽁 결박하여 고정시켜 놓고 주변을 돌아봤더니 작은 어선들은 서로 서로를 묶어 놓은채 항구에 고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큰 배들은 수심이 깊은 저 멀리 바다위에서 정박한 채 바다 속 깊이 닻줄을 내려놓고 거센 파도에 몸을 맡긴채 위아래로 요동치듯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저 큰배들은 왜 항구로 피신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육지에 배를 고정하고, 서로 서로 줄로 묶어놓었던 작은 배들은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로 인히 이곳저곳 부딪혀 파손이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멀리 깊은 바다 속에 닻줄을 내리고 높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던 큰 배들은 아무런 손상이 없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묵상하는 가운데 제 안에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친 세상 속에서 죄의 유혹이라는 거센 바람과 세상의 가치관, 나의 자아와 같은 파도들이 날 뛰에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마음 깊숙이 그 중심에 들어가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태풍과 같은 극심한 풍랑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 중심으로 들어가 닻줄을 내린다면 나의 영혼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거센 풍랑이 나를 흔들려고 하지만 하나님 마음 깊숙이 들어가 닻을 내리고 나의 자신을 맡긴다면 내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평강 가운데 항해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100% 맡겨야 합니다. 세상은 그리고 사단은 그리스도인된 우리를 뿌리채 뽑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거센 풍랑으로 흔들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떠한 일들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닻줄을 하나님께 내린다면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설프게 세상과 하나님 경계선에 자신을 묶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가는 깨지고, 부서지고 뒤집어지는 등 좌절과 상처, 얼룩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깊숙이 들어 닻줄을 내리고 모든 것을 맡긴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늘 하나님 안에 깊숙이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결론 내리기를 "여호와는 나의 산성, 요새, 피난처"가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안정감은 지금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십니다.

     

    주 나를 광야로 이끄실 때

    기쁨으로 나아 가리라

    신실하신 주를 신뢰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나는 두렵지 않네

    주 나와 항상 함께하시네


    주는 나의 모든 필요

    주가 나의 푸른 초장 되시네

    주님 안에 나 거하리

    그곳이 내가 숨 쉬는 곳


    Joshua
    조회수1229
    2022-10-27
  • 본문내용

     

    자기가 ‘주님’ 이라고 부르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겸손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을 권리가 없다. 언젠가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라는 질문을 하셨다. 


    나는 여기서 일부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은 반론 하나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율법을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우리의 의를 위해 부활하셨으므로 우리가 계명들을 지킬 필요는 없다.  오로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지난 50년 동안 복음주의의 메시지를 약화시키고, 교회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내렸다. 덕분에 이제 교회의 도덕적 수준과 세상의 그것은 거의 구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으로, 믿음으로부터 순종을 분리하는 것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전의 양면이 서로 붙어서 하나가 되어 있을 때에만 정상적인 돈으로 간주된다. 이 두 면을 서로 분리하면 동전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믿음이 전부가 되어버렸고, 순종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신앙인들은 도덕적으로 약해졌고, 영적으로 맹목이 되었으며,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약의 기독교에서 멀어지고 있다.


    영적 진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기 전에는 그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우리의 주님이 아주 분명히 밝히셨다. 그분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라고 말씀하셨다. 의지와 행함(적어도 ‘행하겠다는 의지’)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앎이 따라온다. 진리는 엄격한 선생이기 때문에 자신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드러내기 전에 먼저 순종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진해서 하는 순종’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불가능하다. 순종 없는 믿음만을 갖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Joshua
    조회수1618
    2022-06-25
  • 본문내용

    이사야 43장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선택된 백성의 허물을 도말하고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 스스로를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이사야서를 좋아하기 때문에 많이 읽었지만 새롭게 다가온 말씀에 눈길을 멈췄다.

     

    "하나님 스스로를 위해서라고?"

     

    꼬리에 꼬리가 물들이 따라오는 생각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은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우상숭배하며 죄를 범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기로 아예 작정하고 죄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라고 용서를 선포하신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20여년 넘게 사역자의 길을 걸으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중 같이 팀을 이루며 함께 사역을 했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예상치도 못하게 뒷통수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믿고 신뢰했던 사람을 사역자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베풀고, 사역의 자리를 물려줬을 때에 예상치 못하게 배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적지않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시간들을 놓고 씨름을 하기도 하였다.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이며, 그 중에 한 민족을 택하여 언약을 맺으셨고, 돌보시고 함께하셨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뒷통수를 쎄게 친 것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수십 아니 수백, 수천번 이상...

    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용서하셨고, 품으셨다. 그 이유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그 자체이기에 그 사랑을 베풀지 못하면 안될 정도로,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사랑을 베풀기 원하고 계신다.

    마치 사랑을 베풀지 못하면 안달이 난 것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기를 원하시고, 또 베푸셨다. 그것도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어주는 사랑을 베푸셨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니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다는 것은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뒷통수를 수 없이 쎄게 맞아도 끊임없이 베푸셨던 하나님처럼 나 역시 그래야 한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사랑을 베풀고... 이것이 나의 삶의 과정이어야 한다.

     또한 내 삶 가운데 도적이든, 실수이든 하나님을 밀어내는 영역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몸부림치며 해결해야한다. 이것이 거룩함으로 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나에겐 이러한 능력이 없다. 난 너무나 연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성령님께서 내 삶을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있다. 난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믿음의 싸움을 걸어갈 때에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 믿는다.


    Joshua
    조회수1722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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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입은 치유자 삭개오


    삭개오는 여리고라는 대도시의 세리장이다. 근동지역의 3대 세무소의 하나인 여리고의 세리장, 오늘 말로 세무소 대표이다.

    그에게는 신체적인 장애가 있다. 체격은 왜소했고 키는 일반 성인의 키에 한참 못미치는 작은키였다. IVP 성경배경주석을 보면 삭개오의 키는 150cm 이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명 난쟁이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체적 장애를 입는 사람들을 볼 때에 부모의 죄의 영향이나 그 사람의 죄의 영향으로 심판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삭개오의 신체적 장애는 죄의 심판의 결과였다.


    이런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였다. 유대인들이 문둥병자와 같이 멸시하고 가까이에 가지도 않는 존재, 마치 일제시대때 친일파를 보고 증오하며 멸시했던 것처럼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멸시의 대상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창녀와 같은 공식적인 죄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유대인 사회 공동체에서 출교당했고, 유대인들과 어떠한 교류도 맺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으로 인해 삭개오는 중죄인으로 찍힘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배격당했던 삭개오는 열심히 일해 큰 부자가 되었고, 그의 능력도 인정받아 결국엔 세리장이라는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갔다. 마치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돈의 권력을 가지고 위에 서서 떵떵거리며 살고자 했던 것처럼, 삭개오는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의 성공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런 삭개오가 말로만 들었던 예수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거리로 달려나가 돌무화과 나무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본 것이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라고 말씀하셨다.


    “속히 내려오라”


    어느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속히 내려오라”라는 메시지가 과연 높은 나무 위에서 내려 오라는 말로 들리지가 않았다.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려 나아가 죽음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는 삭개오를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외침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삭개오야. 너 거기 있으면 죽을 수 밖에 없어. 그러니 너가 있는 자리에서 속히 내려오라, 너의 힘으로 성공을 이루고자 했던 탐욕의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라. 돈을 우상으로 삼고, 돈의 권력에 취해 있는 그 자리에서 속히 내려오라. 너를 멸시하고 능멸했던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보란듯이 잘 살려고 했던 그 자리에서 속히 내려오라” 


    삭개오를 살리기 위해 외치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 외침을 들은 삭개오는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드렸다.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놓고,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자면 4배나 값겠다”라고 고백하며 회개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처럼 죄인 취급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는 다른 세리들을 모아 예수님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 라는 책이 생각났다. 내가 받은 상처가 예수님을 만날 때에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는 놀라운 일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다. 상처를 내 힘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에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결국엔 죄의 길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예수 그리스도께 들고 간다면, 예수님은 약함을 강함으로 바꿔주시고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예수님 역시 상처입은 치유자 이셨다.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능멸을 받았고,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분이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공감하시며 치유하고 계신다.


    브리즈번시티순복음교회는 상처입은 치유자들이 모이는 신앙공동체가 되길 소원한다. 상처를 내 힘으로 감추고 해결하려고 해서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 회복되는 일들이 일어나길 소원한다. 그래서 회복의 간증을 들고 상처입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되길 소원한다.


    Joshua
    조회수1763
    2021-11-14
  • 본문내용

    사사기 6장을 보면 기드온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을 하던 중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사사로의 사명을 주신다.

    처음 사사로 부르심을 받을 때의 기드온은 자신은 므나셋 중에 극히 약하고 내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여러가지 증표를 요청했고, 하나님은 기드온이 요청한 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다.

    결국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한 기드온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300명을 뽑아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기드온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을 뿐이다.


    하나님께 순종한 결과는 엄청난 승리를 가져왔다. 승리를 경험하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당신과 당신의 아들 손자들이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니다. 나와 나의 자손들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다.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라고 거부한다.


    그런데 그 이후로 기드온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금을 걷고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성읍 오브라에 둔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금으로 만든 에봇을 우상숭배하게 된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겸손하게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했던 기드온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도록 에봇을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묻다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안을 내쫒은 사람이 기드온 자기 자신인 것을 알리고자 상징물을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행위가 자신의 집에 올무가 되어 끊임없이 죄를 범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기드온의 첫 시작과 모든 과정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했다.

    그러나 끝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무너졌고, 결국엔 금으로 만든 에봇이라는 우상을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었다.


    11월달이면 우리 교회는 브리즈번 시티로 나가 예배를 드린다.

    우리 교회의 최고의 가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교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매순간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로 인정받고자 할 때에 모든 것이 그의 다짐은 무너지게 되었다.

    기드온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온 여러 왕들도 첫 시작은 선했지만 끝은 좋지 않게 끝난 왕들이 많이 있다.


    기드온의 삶을 묵상하면서 내 안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되돌아봤다.

    아직도 살아 꿈틀고 있는 옛자아의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되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십자가 앞에 다시한번 못박고 철저하게 에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자로 서고자 매일 새벽마다 씨름하고 있다.


    처음과 끝이 동일한 목회자와 성도.

    처음과 끝이 동일한 교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교회가 되어야 하기에 오늘도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인공이시다.


    Joshua
    조회수1660
    2021-10-29
  • 본문내용

     

    보호받고 사랑을 받아야할 형제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은 요셉.

    가장 믿고 신뢰를 해야할 형제에게 버림을 받은 요셉.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살만할때 즈음에 자기가 행하지도 않은 일로 누명을 받고 감옥에 갇힌 요셉.

    꽉 막힌 감옥에서 좌우로 둘러봐도, 위아래를 살펴봐도 갑갑한 감옥에 갇힌 요셉.

    술관원과 떡관원의 꿈을 해몽해주고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의 요셉의 마음은?

    나갈 것에 대해 기대를 했지만 요청을 잊어버린 술관원으로 말미암아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을 때의 요셉의 마음은?


    요셉의 마음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죽음보다 더 심한 심적 고통과 수렁보다 더 깊은 절망이  다가왔음에도 요셉은 하나님앞에 온전히 서기로 결정했다.

    요셉의 믿음의 근원은 어디서 왔을까?

    분명한건 아버지로부터 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요셉은 끝까지 붙잡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생각과 마음에 쌓이는 고통과 절망과는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잡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일하셨고, 가족 공동체에서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요셉. 

    비오는 이 아침에 성경속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를 읽다가 갑작스럽게 요셉의 마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내면을 살펴보게 된다. 

    요셉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보다보니 한없이 작아진다.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한번 고백한다.

    나 역시 요셉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함을 배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셉처럼 하나님을 찾는데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작정 금식기도를 시작해야겠다. 나

    철저하게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밀알이 되어 브리즈번 시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어지는 도구가 되길 소원한다.

    그리고 브리즈번시티순복음교회는 밀알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밀알 공동체가 되길 소원한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실 것이다.

     

     

    Joshua
    조회수1755
    2021-10-14
  • 본문내용

     

    이른 새벽. 사모와 함께 성경통독을 하면서 "기다림"에 대해 묵상을 하게 되었다.

    창세기 15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시는 장면이 마음 가운데 깊이 들어와 하루종일 기다림에 대해 되새기며 묵상을 했다.

    하나님께서 환상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하늘의 별처럼 네 자손도 이와 같을거다"(5절)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6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이 땅을 네게 주겠다"라고 (7절) 약속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겠냐며 하나님께 증표를 요구하였다(8절). 

    아브라함의 요구에 하나님은 삼년된 암소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비된 각 제물들을 쪼개고 마주 대하여 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임재하시지 않고 솔개만 그 사체 위에 내려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솔개를 내쫓기위해 사투를 버렸다.

    결국 해는 지고, 아브라함은 지쳐 깊은 잠이 임할 때에 비로서 하나님께서 횃불로 오셔서 그 증표를 보여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기다림"에 대해 묵상을 했다.


    21년이라는 선교사역에서 본격적인 목회의 길로 들어온 2021년이 나에게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브리즈번순복음교회에서 목회의 길을 시작할 줄 았았으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시티에서 새로운 부흥을 위해 부르셨다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주님 오시기 바로 직전에 늦은비의 부흥이 곧 올 텐데 그때를 위해 브리즈번시티순복음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마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릴 때에 어김없이 솔개와 같은 영적인 공격은 일어난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재건할 때에 방해했던 세력들이 있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어김없이 영적인 공격이 일어난다

    하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 횃불처럼 임하시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기다림 가운데 있을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예배 가운데 강한 불(횃불)로 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결단코 브리즈번시티순복음교회의 신앙 공동체를 통해 이 땅 가운데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실 것이다. 아멘!!

     

    2021년 10월 12일 성경통독 후 묵상

     

    Joshua
    조회수1664
    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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